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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지 (2012) 20년전 '우리별1호' 주역들 "우주 정복 꿈 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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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983회 작성일 22-09-23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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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별1호' 발사 20주년①] 92년 8월11일 한국 첫 인공위성 발사
위성기술 보유국 발판 다져…국내외·각계서 위성과의 '인연' 지속

대한민국 우주개발의 첫 포문을 연 우리별 1호가 발사된 지 오는 11일로 20주년이 된다. 개발 초기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인공위성 기술을 가질 필요가 있느냐는 비난도 있었다. 실제 1인당 국민소득 7000달러 이상 되는 나라에서 모두 우주기술 개발을 시작했다는 조사결과도 나와 있다. 당시 우리나라는 5000달러 수준. 여러 악조건 속에서 우주기술 보유 여부에 따라 국가 위상이 달라진다는 정부의 의지와 연구원들의 집념이 모여져 개발 2년 만에 발사까지 성공한 '우리별 1호'. 그 안에 담겨진 20대 젊은 연구원들의 숨은 노력을 짚어보고 당시 참여했던 그들의 현재 모습, 한국의 우주개발 방향을 집중 진단한다.

"디스, 네프, 윗트…트와, 두, 엉, 아니마쥐(발사)."
"킷샛 세퍼레시옹 노말(우리별 분리 정상)."
1992년 8월 11일 프랑스령의 기아나 우주센터. 대한민국 우주개발의 첫 신호탄 '우리별 1호'가 힘차게 우주를 향해 날아올랐다. 그리고 발사 12시간만인 저녁 8시 35분, 우리별 1호는 데이터들을 보내왔다. 위성이 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우주 불모지 대한민국이 인공위성보유국으로, 우주개발 기술국으로 세계에 이름을 올린 역사적인 순간이다.

우리별 1호 발사 성공 이후 대한민국은 93년 과학관측 로켓 1호, 우리별 2호,  95년 통신위성 무궁화 1호, 96년 무궁화 2호, 97년 과학로켓 2호, 99년 우리나라 최초의 고유모델 '우리별 3호'까지 위성기술 보유국으로 성장을 거듭해 왔다.

대한민국의 우주기술개발이 이처럼 거침없는 행보로 내 달릴 수 있기까지 우리별 1호를 빼놓고 이야기 할 수 없다. 우리별 1호는 국민소득 5000 달러 정도로 우주개발을 시도하는 것조차 무모해 보였던 시기, 열정만으로 우주기술 습득에 뛰어든 20대초반의 젊은 과학도들의 땀과 노력들이 녹여져 만들어진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그 출발점은 1989년 최순달 KAIST 교수로부터다. 우주기술의 필요성을 간파한 그가 KAIST인공위성연구센터를 출범시키고 영국의 써리대학에 공동연구 프로그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써리 대학에서 최 교수의 제안을 수락하면서 1989년 가을 1차로 5명, 그 이듬해 4명의 KAIST 졸업생들이 그 대학으로 유학을 떠난다. 학생들을 직접 선발한 최순달 교수는 젊은 과학도들에게 자신감과 '헌신(Devotion)'이라는 말로사명감을 강조했다. 그리고 격려와 따끔한 충고도 아끼지 않았다. 최 교수의 조언은 젊은 과학도들의 가슴에 새겨졌고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 위성개발에 몰두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젊은 과학도들은 1년만에 석사 과정을 마치고 위성개발에 돌입했다. 작은 위성이라도 수십명의 인원이 필요한데 써리대학 관계자의 지원이 있었지만 9명의 인력이 위성개발이라니, 그들의 고생스러움과 피나는 노력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짐작이 되리라.

2012년 올림픽 경기가 한창인 영국 런던. 지금은 세계 각국의 건각들이 저마다의 기량을 다투고 있지만 20여년 전에는 런던 남서부의 작은 도시 길포드에 위치한 영국 써리 대학에서 우리나라의 젊은 과학도들이 또 다른 역사를 쓰고 있었다.

원격검침과 명령부를 담당한 김성헌, 주컴퓨터와 보조 전원부를 맡은 김형신, 임무분석과 열해석, 수신기, 변복조부, 안테나를 담당하는 박성동, 기계구조부와 태양센서, 전원부를 맡은 장현석, 주컴퓨터 프로그램과 조립시험을 맡은 최경일(이상 유학 1기), 송신기부 담당의 민승현, 디지탈 신호처리부의 박강민, 지구표면 촬영장치를 담당한 유상근, 위성의 자세 제어를 맡은 이현우(유학 2기)가 그 주인공.

우리별 1호 발사 20주년이 되는 이즈음. 과연 당시 주역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지금부터 그들을 만나보자. 20대 초중반의 젊은 과학도에서 지금은 40대 중반을 맞고 있는 그들은 국내·외 각계각층에서 위성기술의 중심축으로 활동 중이다. 저마다의 소신에 따라 위성개발업체나 대학교, 출연연 등에서 모두 인공위성과 관련된 일에 참여하고 있다.

◆해외파들, 미국, 프랑스, 독일 등에서 우주개발 기업 또는 대학에서 활동

대한민국의 우주기술 개발에 과감히 출사표를 던졌던 젊은 과학도들 중 몇몇은 국내를 넘어 미국, 프랑스, 독일 등에서 위성개발과 관련분야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미국파는 미국의 전투기와 항공우주제품 제조업체인 레이시언(Raytheon)의 김도형 박사, 정보전달 전투시스템 개발기업 Argon ST의 류봉균 박사, NASA의 김승범 박사, 뉴욕대학교에서 의공학을 지도하고 있는 김성헌 교수를 꼽을 수 있다.

또 굴지의 위성기업 프랑스 유텔셋(Eutelsat)의 최경일 박사, 인공위성 개발 전문기업 독일 OHB에서 통신위성 개발에 참여하고 있는 전홍준 박사, 일본 Astro Research라는 회사에서 일하다가 최근 창업을 한것으로 알려진 남명룡 박사 등이 해외파다.

그 중 주컴퓨터 프로그램과 조립시험을 맡은 최경일 박사는 세계적 규모의 위성기업 프랑스 유텔셋(Eutelsat)에서 위성개발 핵심멤버로 일하고 있다.

유텔셋은 프랑스를 근거로한 위성기업으로 총 23개의 위성을 보유하고 있는 세계 3위 규모의 기업이다. 1983년 6월 첫 위성을 성공리에 발사한 위성 전문기업이다. 유텔셋은 지난해부터 시작된 과제 EDRS(European Data Relay Satellite)탑재체를 주도하고 있다. 발사 예정은 2015년이다.

최경일 박사는 유텔셋에서 위성의 사양을 결정하고 제작, 감리하는 역할과 위성의 발사, 초기 운영 등 위성분야 핵심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가 프랑스로 가게 된 것은 우리별 1, 2호 개발과 발사를 성공리에 마치고 진로를 고민하던 중 영국 유학시 인연이 있던 프랑스 교수의 알선으로 프랑스 정부 장학금 지원과정에 선발됐다.

프랑스 뚤루즈에서 인공위성 엔지니어링분야에 대해 더 많이 공부할 수 있었다는 최경일 박사. 그가 학위를 마칠 무렵인 1998년, 대한민국은 IMF가 시작됐고 인공위성센터도 어려움을 겪던 시기였다. 그는 국내에 들어오는 대신 유럽의 우주공학 기업에서 경험을 더 쌓기로 진로를 변경한다.

최 박사는 "처음에는 독일의 유럽기상센터에서 엔지니어로 근무하다 프랑스 유텔셋에서 스카웃 제의가 들어와 프랑스로 오게 됐다"면서 벌써 12년이 넘어가고 있다며 지난 시간을 돌아봤다.

◆국내 정부출연기관 위성 분야 핵심리더, 대학에서 후학 양성도

국내 위성개발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이들은 정부출연기관과 대학에서도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써리대학 유학 2기인 박강민 박사는 ADD, 이서림은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양호순 박사는 한국표준과학연구원에서 위성분야 연구를 진행 중이다.

2005년부터 국방과학연구소(ADD)에서 위성분야 연구를 주도하고 있는 박강민 박사는 우리별 1호 개발 당시 그는 우리말로 방송이 돼야 한다는 계획에 따라 그 어디에도 없는 우리말 방송 프로그램 개발을 해냈다. 이후 위성에는 당연히 그가 개발한 우리말 프로그램이 탑재됐다.

그는 우리별 1호 이후 2호, 3호, 과학위성 1호 개발에 참여했다. 쎄트렉아이 설립에 참여하며 당연히 기업행이 예상됐다. 그러나 서울대 대신 KAIST를 선택하고 위성개발에 도전했듯이 그는 다른 선택을 했다. 쎄트렉아이 지분을 몽땅 돌려주고 그는 더 큰 연구를 할 수 있는 연구소로 자신의 진로를 결정했다.

박 박사는 "항상 도전하기를 좋아한다. 20년전으로 돌아가 다시 그 순간이 와도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당시 모두들 해 낼 수 있을거라는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있었다. 백지상태에서 위성개발에 필요한 기술을 스펀지처럼 흡수했다"며 어려웠던 환경마저도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었다고 해석했다.

그는 "지금까지 우리는 이미 레퍼런스가 있는 기술을 따라잡는데 급급했다. 우주기술은 그런 단계가 아니다"라면서 "우주기술은 새로운 개념의 기술이다. 리스키한 부분을 인정하고 투자를 해야한다"고 덧붙였다.

대부분의 우리별 주역들이 개발이나 교육 분야에서 위성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행정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이가 있다. 항공우주연구원 국제협력팀에 이서림 선임연구원이다.

우리별 1호의 소프트웨어 운영과 2,3호의 소프트웨어 개발을 담당했던 이 연구원은 대기업에서 근무하며 상업통신위성(한별위성)과 관련된 일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항공우주연구원 정책연구실에 들어갔다.

"우리별 당시엔 개발에 직접 참여했는데, 지금 행정분야의 일을 하게 된 건 위성 개발도 해봤고, 기업에도 있으면서 여러 경험을 했기 때문에 출연연의 역할이나 우주개발 정책을 만드는 데 내 경험을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국제협력팀 내에서 북중남미 협력 담당인 이서림 연구원은 우리별을 비롯한 위성개발을 직접 담당하며 얻은 실무적인 노하우를 행정과 경영의 측면에서 녹여내는 일을 하며 우리별 개발 주역으로서 당당히 한 길을 가고 있다.

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우리별 과학도들도 다수다. 김태정 인하대 교수, 김형신 충남대 교수, 박성민 이화여대 교수, 선종호 경희대 교수, 이우경 항공대 교수, 이임평 서울시립대 교수, 이준호 공주대 교수 등이 그들이다.

그중 써리대 유학 1기의 김형신 충남대 교수는 유학을 생각하고 있던 차에 영국 유학 기회가 있다는 공고문을 보고 무조건 지원했단다. 그는 충남대학교 컴퓨터공학부 교수로 후학 양성에 주력하고 있다. 그는 1989년 영국 써리 대학 유학순간부터 9년동안 위성에만 빠져 지낼정도로 위성개발에 강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전산학도인 그지만 위성개발에 필요한 배터리 분야도 담당했단다. 김 교수는 "배터리 100개씩 닦으며 선별작업을 하는 일이 무척 힘들기도 했지만 위성의 불안요소가 될 수 있는 전원 시스템을 알수 있는 계기다 됐다"면서 "그 경험을 바탕으로 위성기술 관련 국가 과제도 하고 있다"며 지난 시간을 돌아봤다.

김 교수는 영국인들과 같이 일하면서 부품 등 없는 것을 만들어내며 일하는 그들의 정신이 인상적이었다고 기억했다. 또 위성 발사 후 첫 교신이 있기까지의 기다림이 가장 긴장되는 순간이라고 회상했다.


그는 우리별 1호 발사 성공이후 KAIST 인공위성연구센터 연구원으로 우리별 2호, 3호 제작과 발사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정부 지원이 줄고 위치가 불안해지면서 위성개발에 참여했던 핵심멤버들이 하나 둘 빠져 나갔다. 김 교수는 진로를 결정해야할 때가 왔다는 생각에 진행하던 박사 학위과정을 마치고 미국의 포닥(박사후 과정)을 선택했다. 그리고 충남대에서 실무경험이 있는 교수진를 선발한다는 소식에 지원을 했고 다양한 경험과 지식을 갖춘 그가 선정됐다.

현재 그는 학생들을 지도하며 우주관련 국가과제 연구에도 참여하는 등 여전히 위성개발의 꿈을 실현해 가고 있다.

◆위성개발벤처 설립 후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시켜가는 주역들도

해외와 국내 정부출연기관, 대학에서 위성전문가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이들도 있는 반면 아예 인공위성 벤처를 세워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켜가고 있는 우리별맨들도 있다. 박성동 대표를 중심으로 김문규, 김병진, 김이을, 민승현, 박원규, 신동석, 이현우, 장현석은 쎄트렉아이 창업부터 참여하며 위성 전문기업으로 쎄트렉아이의 성장을 주도하고 있다. 유상근 한비전 사장은 산업용 카메라 및 영상소자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쎄트렉아이는 국내 유일의 위성체계 개발 능력을 보유한 위성 전문기업으로 1999년 우리별 개발에 참여한 핵심인력들이 설립한 회사다. 국내외 많은 기관을 대상으로 우주기술 관련 토탈 솔루션을 제공하며 그 기술력은 인정받고 있다.

특히 2009년 말레이시아의 라작샛(RazakSAT) 위성과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샛(DubaiSat)-1 위성이 성공적으로 발사되면서 세계시장에서 소형지구관측 위성전문기업으로 급성장했다. 2008년 코스닥에 진입한 쎄트렉아이는 지난해 매출액 286억4863만원을 기록, 29.7%의 증가를 보이며 시장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쎄트렉아이에서 일하고 있는 이현우 박사는 우리나라에서 위성을 가장 많이 만들었다. 우리별 프로젝트 당시 수많은 에피소드의 주인공으로 연구실의 개그맨으로 불리던 이 박사는 위성의 자세제어를 맡았었다. 그는 우리별 프로젝트를 마친 후 인공위성연구센터에서 주관하는 과학위성 1호 개발에도 참여했고 2004년 1월 쎄트렉아이로 옮겨왔다.

이 박사는 "우리별 개발을 함께 했던 사람 중에 대학에 간 분들도, 회사로 온 분들도 있는데, 다들 적성을 따라간 것 같다. 나는 개발하는 게 적성에 맞아 이곳에 왔고 만족한다"며 "우리 회사서 '클론 프로젝트'라고 자신의 클론을 만들자는 인력양성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는데, 나를 넘어서는 클론을 만들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쎄트렉아이에서 '두바이샛2'를 비롯해서 스페인에 수출할 위성을 만들고 있는 이현우 박사는 우리별을 통해 맺은 인공위성과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써리대학 1기인 박성동 대표는 "우리별 20주년이라는 말은 우리나라의 우주개발 역사가 20년이 되었다는 얘기다. 최초 10년은 외국기술을 배워 독자적인 위성을 개발했다는 의미를, 이후 10년은 우리가 만든 위성을 외국에 수출했다는 의미를, 그리고 앞으로의 10년은 우리가 만든 중소형 지구관측위성이 세계의 대표적 인공위성이 되는 의미를 세기고 싶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쎄트렉아이는 두바이샛 1호 위성영상 판매를 시작으로 위성영상 서비스 사업으로 그 사업의 범위를 확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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